초등학생 때 집에 학생백과사전이 열 몇 권 있었다. 이 백과사전이 우리집에 오게 된 경위는 참으로 오묘하고, 나에게 미친 영향 역시 더 오묘하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다. 부모님은 뭐 하나 가진것 없이 나셔서 결혼하신거라, 신혼초부터 사실 매우 생활이 빡빡했다고 하셨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98년은 IMF 직후라 두 집 건너 한 집마다 직장을 잃은 가장들이 보이던 그런 시기였다. 우리 집도 IMF 사태에서 자유로울 순 없어서 줄어든 수입을 메꾸기 위해서 어머니께서는 뭐라도 했어야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집에서 공부방을 운영하셨는데, 처음에는 학생이 별로 없었지만, 옆 동에 살던 친구 한 명의 받아쓰기 성적을 급상승시킴으로써(!) 공부방은 입소문을 타게 됐고, 동네에서 많은 애들이 공부를 배우러 왔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불법이었다는 거다. 과외가 불법이듯, 공부방이 불법인거 역시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과외나 공부방이 불법이라고 신고/고발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으니 문제... 옆옆 동에 살던 한 아주머니가 이를 아니꼽게 생각했던건지 어떤건지 어머니를 고발했고, 당분간 어머니는 경찰소를 들락날락하셔야 했다. 물론 일은 잘해결됐지만. 이 얘기를 한 이유는 학생대백과사전을 주신 분이 이 고발을 하셨던 아주머니셨기 때문이다. 자기는 자식들이 다 커서 이제 저런 책 필요없다며 백과사전을 훈훈하게 주시다가도 갑자기 고발을 해버리는 알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셨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 책이 나왔다. 표지디자인을 보니 당시 우리집에 있던 백과사전이 1000% 확실하다.
아무튼 복잡한 상황을 거쳐 이 학생대백과사전이 열 몇권이 우리집에 오게 되었다. 출판년도를 정확하게 기억할순 없지만, 안에 적힌 내용으로 보아 아마 80년대말이나 90년대 초에 간행된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기억상 백과사전 안에 끝말잇기를 하던 부분이 있었는데 무우 -> 우산 -> 산타클로스 로 이어지는 그림이 있었던것. 1988년 한글맞춤법이 개정되면서 무우는 무로 적게 되었으니, 분명히 그 이전에 만들어진 책이라고 거칠게 추측해본다. (당연히 서술어도 -습니다가 아니라 -읍니다 라고 적혀있었다! 잠깐 곁다리로 새보자면, 88년 한글맞춤법이 개정되고 한동안 혼란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98년이 될때까지도 무려 10년이 지났지만, -읍니다, 무우, 돐 같은 표현을 주변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학교에 있는 책들도 그런게 많았기에 뉴스나 TV프로그램에서도 자주 한글 맞춤법이 바뀐것에 대해서 공지해줬던게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1학년때 할머니 선생님이 오래된 책들이 다 맞춤법 틀린거라고 난로에 던져서 태워버리던 장면은 덤ㅋ)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학생백과사전이 나에게 무슨 오묘한 작용을 했느냐하면, 당시 우리집에 컴퓨터가 있던 방은 서재방으로 쓰고 있는데, 공부방 역시 여기에서 진행했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엄마가 수업중인 동안에는 내가 컴퓨터를 할수가 없다는 말이었다. 심한 경우는 서재방 + 거실에서 수업을 하실때도 있어서, 그럴때면 컴퓨터도 TV도 볼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혼자 방에 쳐박혀있자니 너무 심심했던 초등학생은, 집에 온뒤로 한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학생백과사전을 펼치게 된 것이다. 표지부터 재미없게 생겨서 내용까지도 재미없을줄 알았는데, 의외로 재미있었다는게 문제였다! 1
예상외로 내용은 깊이가 있었다. 6차교육과정(이거나 혹은 더 전)을 기반으로 만들어진게 흠이라면 흠. 기억상 2권 산수에는 단순한 계산법들이 있어서 유치해서 안 읽었고, 3권 수학을 좀더 읽었던거 같다. 당시 교육과정을 잘 따라서 2진법-5진법-10진법 간의 변환이 있었던게 아직도 기억에 난다. 교육과정에서 5진법이 제외된게 7차때부터이니, 확실히 7차 이전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얼마나 책이 오래된 것인지를 부연하자면, 4권 영어에는 촌스럽게 알파벳부터 소개를 해준다. [에이], [비이], [씨이]... 그것도 한글로 발음을 적어서. 재밌게 읽었던 책은 수학과 자연과학 계열의 책이었다. 나머지 책들은 열었다가 지루해서 덮어버렸다. 특히 천문 우주 분야는 하도 읽어서, 태양계 행성이랑 행성별 위성이랑 태양으로부터의 거리, 자전/공전 주기까지 다 외워버릴 정도였다. 결론만 말하자면, 엄마가 밖에서 수업하는 동안 나는 방에 앉아서 이걸 열심히 읽어댔다. 나중에 재미붙인뒤에는 게임할 수 있을때도 책을 읽기도 했다. 2
이제 시간은 흘러 [그냥 옛날 이야기 1]에서 다루었던 초3소년의 시대로 돌아왔다. 한동안 홈페이지 붐이 일고 지나간뒤, 초3 학생은 홈페이지 뿐만 아니라 응용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졌다는 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알지 못해 포기하려고 할때,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은 학생백과 사전의 '컴퓨터' 분야였다. 왜 그동안 그 분야 책을 안 읽었는지 나도 알수 없었다. 그 책의 앞쪽에는 컴퓨터의 역사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었고, 뒤쪽에는 최신 컴퓨터를 설명하면서 도스가 깔린 컴퓨터로 이것저것 다루는 걸 설명해줬다. 그리고 학생들이 재밌게 다룰만한 프로그래밍 언어로 BASIC을 소개했는데, 이걸로 단순한 계산기에서부터 복잡한 게임까지 만들수 있다고 설명이 되어 있었다. (실제로 책에는 계산기 예제에서부터 원과 각종 도형을 그리는 예제까지 다 들어있었다!)
근데 문제는 베이직을 어떻게 까는지 설명이 안나와 있었다는거! 사실 그럴만도 한게 XP나 그 이전의 컴퓨터까지만 해도 QBasic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 컴퓨터에 베이직이라는 게 깔려있지 않아서 프로그램을 만들수 없다고 생각했던것이다.
추억의 비베6.0. 마우스만으로 컨트롤을 배치하고 프로그램을 만들수 있다는 것 때문에 당시 초보자들에게 널리 환영받았던 개발툴
인터넷에 베이직을 검색해봤다. 분명 내가 의도했던건 백과사전에서 봤던 파란 화면에 타이핑해서 코드를 쳐넣을 수 있는 베이직 인터프리터였겠지만, 98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Visual Basic 6.0을 출시하면서 당시 검색 결과에 나온 항목들은 죄다 비주얼 베이직에 관한 내용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거라도 다운받아보려고 했는데, 어디서 다운받아야하는지 몰랐다. 지식인에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질문이 있었는데, 그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답변이 달려있었다.
그거 정품은 100만원 정도해요. 사서 쓰실거 아니면 프루나 같은데에서 구해보세요.
엄마한테 가서 말했다. "프로그램 만들고 싶은데 프로그램 만드는 프로그램이 100만원이래. 사줘..." 당연히 거절당했다. (아마 사준다고 하셨어도 어디서 사야하는줄도 몰랐을거다.) 그래서 처음으로 프루나라는 것을 이용하게 됐다. 그리고 어떻게 됐냐면..? 다음 이야기는 초3소년이 중학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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