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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경제와사회] 보고서. 무엇이 역사를 움직이는가

수업노트/한국고대경제와사회

by ∫2tdt=t²+c 2013. 10. 31. 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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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 채점이 끝났으니, 업로드해도 되겠죠. 잘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는 썼으니 혹 필요하신 분들 참고하시면 도움이 되리라 믿으며 창피함 감수하며 올립니다ㅋ

나름 앞부분에서 기존 이론들을 열심히 정리햇는데, 뒤로 갈수록 지쳐서...

사실 제일 중요한 제 견해가 들어간 마지막 문단은 분량도 부족하고 쓰다가 만 기분이네요. (사실 썰풀라면 더 풀수 있는 부분인데 마감이란 녀석때문에...!)










무엇이 역사를 움직이는가 10학번 이민철 1. 들어가며 2. 영웅 중심의 역사 해석 가. 칼라일과 우즈의 견해 나. 영웅사관의 한계 3. 유물론적 역사 해석 4. 민중 중심의 역사 해석 가. 민중사학의 부상 나. 민중사학의 한계 5. 무엇이 역사를 움직이는가 1. 들어가며 역사의 원동력에 대한 논의는 인류가 역사를 기록한 이래로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위대한 영웅이 나타나 역사를 바꾸어 나간다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고, 정치적 사상과 윤리‧도덕과 같은 정신적인 구조가 역사를 실현해 나간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모든 역사는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극단적으로 주장한 이도 있었고, 유물론에 입각해 역사를 움직이는 원인은 경제적 요소에 있다고 말한 학자도 있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역사의 동인에 대해 갑론을박하며 자신의 이론을 굳건히 해왔지만, 역사의 동인을 무엇으로 설정하는가는 역사의 해석 관점과 발전 방향에 대한 당위가 관계된 중요한 문제이기에 조금도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본 보고서에서는 책 경제사관의 제문제 Seligman, The economic interpretation of history (1917, c1902) ; 현대문화연구회 옮김, 1979 경제사관의 제문제, 한마당. , 역사와 인간 Sidney Hook, The Hero in History:A Study in Limitation and Possibility, 1943, Beaco Press ; 민석홍 역, 1982 역사와 인간, 을유문화사. 과 여러 논문을 바탕으로 역사의 동인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정리해보고, 현재 시점에서 어떤 견해를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지 검토해보려고 한다. 2. 영웅 중심의 역사 해석 가. 칼라일과 우즈의 견해 역사의 원동력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 설명은 영웅과 위인이다.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각 분야의 위인들이 어떤 업적을 이루었고, 그것이 역사와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해 수도 없이 들어왔다.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는 영웅 서사시와 건국 신화를 통해 이는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이러한 현상은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이 등장하기 전에는 역사가 구전되었다는 점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 시기에는 역사를 복합적으로 분석할 틀도 미비했기에, 구전에 용이하고 재미있도록 역사를 영웅 중심의 이야기로 재편성하는 것이 마땅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역사 해석은 체계성이나 학문으로써의 역사로부터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런 과거의 단순한 역사 해석에서 벗어나, ‘역사를 움직이는 영웅’에 대해 체계적인 접근을 시도한 학자로 19세기 영국의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을 꼽을 수 있다. 다음 토머스 칼라일의 견해는 이 논문을 주로 참조하였음. 박진원, 2008, 칼라일과 에머슨의 영웅관 비교 영어영문학연구 34, 대한영어영문학회, 4-10쪽. 그는 자신의 저서 영웅, 영웅숭배, 역사상의 영웅들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역사상 존재했던 이념과 제도, 신념이 가지는 한계들을 분석하고, 하나의 이념이 무너지고 어떻게 또 다른 이념이 등장하는지를 설명하였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이 가지는 모든 이념과 제도는 태생적으로 완전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시간이 흐르면 위협을 받아 무너질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 혁명을 들 수 있는데, 이 혁명은 프랑스 사회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이념, 제도를 무너뜨리고, 무정부상태라는 커다란 무질서를 가지고 왔다. 이 무질서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는데, 사회를 통합시키던 이전의 이념과 제도가 무너졌으므로, 무질서를 극복할 대안이 없는 것이다. 칼라일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영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영웅이 초월적 진리를 터득함으로써 낡은 이념과 제도를 철폐하고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고, 이로써 사회는 다시 질서를 되찾고 건강하게 된다는 것이다. 칼라일에 못지않게 영웅 중심의 역사관을 옹호한 학자로 19세기 미국의 프레더릭 애덤스 우즈(Frederick Adams Woods)가 있다. 우즈는 11세기부터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까지의 유럽 군주들을 연구하여, 지배자와 그 나라의 흥망에 대한 연관관계를 찾아냈고, 이를 통해 “(특히 11세기부터 19세기에 걸친 유럽 역사에) 군주는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지배자와 흥망의 연관관계를 찾기 위해, 지배자의 상태를 현명한 정도를 기준으로, 국가의 흥망은 그 국가의 정치‧경제적 기반을 기준으로 계량화했다. 이렇게 계량화한 자료를 바탕으로 통계분석을 실시하여 연관관계를 찾아낸 것이었다. 이 부분 다음 책을 주로 참조하였음. Sidney Hook, 앞의 책, 51-54쪽. 나. 영웅사관의 한계 앞서 정리한 두 학자의 이론은 그 자체로도 많은 난점을 가지고 있다. 먼저 칼라일 견해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역사 속에서 그의 주장처럼 초월적 진리를 터득하고 새로운 이념을 제시한 영웅을 실제로 찾아보기 어렵다. 실제로 칼라일 자신도 스스로 제시하였던 초월적 영웅을 역사상에서 발견하지 못하여, 게르만 신화의 오딘을 그 모습으로 내세웠다. 둘째, 기존의 이념과 제도를 무너뜨리는 개개인의 활동에는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 그의 이론에서 새로운 이념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이념이 무너지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칼라일은 기존 이념에 구멍을 내는 개인들의 행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오히려 부정적으로 보았다. 셋째, 무질서가 왜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프랑스 혁명의 시기를 직접 체험하였던 칼라일은 혁명이 가지고 온 혼란스러움을 바탕으로 무질서는 부정적이고 극복되어야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이는 안정을 원하던 당시 보수적 지식인들에게 비판 없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마지막으로 영웅 역시 기존 사회의 산물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우즈의 주장은 역사계량학(Historiometry) 우즈가 만들어낸 용어로, 통계적인 분석을 통해 인류의 발전이나 개인의 성격을 규정해내는 역사학 분야를 뜻한다. 표준 번역어가 없어서 역사계량학이라고 표기하였음. 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여러 부분 비판받고 있으나, 이에 대한 비판은 역사의 원동력에 대한 논의와는 관련 없을뿐더러 너무 자명하므로 생략하고 나머지 문제점에 대해 설명하자면, 첫째, 우즈 역시 지배자가 사회의 산물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둘째, 지배자를 제외한 인물의 영향을 무시하고 있다. 셋째, 군주의 영향이 바로 그의 치세 내에 반영될 것이라고 무리하게 가정했다. 넷째, 19세기 이후 지배자의 힘의 쇠퇴에 대해서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19세기 칼라일이나 우즈의 지나친 영웅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몇몇 학자들은 역사에 있어서 영웅의 필요성을 아예 부정하는 입장까지 나아갔다. 영웅의 등장 역시 시대적 요구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납득할 만하지만, 영웅이 역사 발전에 있어서 아무것도 수행한 것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영웅이 사회의 산물이라는 말은 영웅의 등장을 비롯하여 그의 모든 행동이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 개인이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다고 하더라도, 그가 하는 행위의 범위는 그가 존재하는 사회의 상황, 전통, 관습 및 예절에 의하여 광범위하게 제한된다는 것이고, 영웅들 역시 그들이 탄생하게 된 배후의 광범위한 사회적 환경에 의존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Seligman, 앞의 책, 66-70쪽. 이 장에서는 영웅 중심의 역사관을 펼친 칼라일과 우즈의 주장에 대해 살펴보았고, 그것들의 한계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영웅주의와 그에 대한 비판은 역사 속의 영웅들이 사회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역시 기존 사회의 산물이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3. 유물론적 역사 해석 마르크스는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영웅이나 관념이 아닌 경제적 요인에서 찾았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역사는 사상과 이념의 발전을 토대로 해석되었고, 경제적인 요인은 그것에 곁들여지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역사의 동인을 물질에서 찾은 마르크스의 이론을 흔히 ‘사적 유물론’이라고 부르는데, 마르크스는 이 이론에서 사회의 경제적 발전, 생산양식과 교환에 있어서의 변화, 필연적인 사회의 계급 분화와 이러한 계급간의 투쟁에 있어서 중요한 모든 역사적 사건의 궁극적 원인과 주요 동력을 추구하는 역사과정에 대해 설명하였다. 사적 유물론의 강점은 그 동안 이념이나 사상과 같은 정신적인 요인을 통해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었던 사실들을 경제적인 요인과 그 구조를 통해 설명하는 데에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초기 모계사회에서 사유재산이 어떻게 증가하였고, 이는 씨족사회로의 변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토테미즘은 어떻게 발생하였는가‘와 같은 초기 인류 사회의 문제에서부터 십자군 운동, 종교 개혁과 같은 근대 사회의 문제까지 사적 유물론을 통해 설명이 가능하고, 그동안 사회 변화의 동력으로 지적되었던 이념과 사상 역시 경제의 산물임을 밝혀낼 수 있다. 이 문단은 다음 책을 주로 참조하였음. Seligman, 앞의 책, 54-60쪽. 경제적 요인이 지도자나 민중의 힘을 이기고 역사를 변동시키는 사례는 현대 한국사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문민정부 이후 민주화와 정권교체를 열망하던 국민들은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며 역사를 바꾸어내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한국이 신자유주의 흐름에 편승한 시기였고, 노동자, 농민의 삶이 힘들어진 시기였다. 정병욱, 2000, 신자유주의로부터 자유로운 통일국가를 바라며 내일을 여는 역사 1, 내일을 여는 역사, 45-46쪽. 어떤 대통령도, 노동자도 IMF 구제금융을 막을 순 없었고, 어떤 정치인도 농민도 FTA를 막을 순 없었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하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이 점을 신랄하게 드러내보인다. 물론 이 이론 역시 다음과 같은 한계 지점이 있다. 첫째, 역사 발전에 영향을 끼친 윤리, 종교와 같은 정신적 요인을 지나치게 축소하여 해석한다. 둘째, 경제 구조에 집중함으로써, 경제 구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개인들을 무시하게 된다. 오늘날 각종 정치적 변동을 경제적 요인을 통해 설명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자본주의의 발달로 우리의 삶 속에서 경제적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커져가고 있다. 사적 유물론이 앞서 제시한 한계를 지님에도 오늘날 역사를 설명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되는 것은 역사의 경제적 해석의 중요성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 4. 민중 중심의 역사 해석 가. 민중사학의 부상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조류를 따라 역사학은 그동안 조명하지 않았던 개인의 삶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민중 중심의 역사 해석이 역사의 동인을 설명하는 또 다른 이론으로 떠오른다. 민중 중심의 역사 해석에서는 역사를 바꾸어 나간 것은 위대한 영웅이나 지도자가 아니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개인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주로 진보적인 역사학자들에 의해 피력되었는데, 실제로 역사 상 개인들이 사회를 바꾸었던 ‘혁명’에 이론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 이를 드러낸다. 민중 중심의 역사 해석은 등장 시기도 오래되지 않았을 뿐더러 관점 자체가 통일된 견해를 드러내 보이고 있지 않기에 대표적인 학자와 그의 이론을 꼽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한국에 민중사학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성과를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다음 문단은 이 논문을 주로 참조하였음. 정무용, 2011, 민중과 역사 : 1970년대 이후 민중사의 추이와 민중상의 변화 인문과학연구 16,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 160-164쪽. 70년대 일어난 산업화의 모순과 80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사에서 민중을 역사발전의 주체로 등장하게 만들었다. 80년 항쟁의 경험은 새로운 세대들이 민중과 광범위하게 결합하는 촉매로 작용하여, 각종 사회운동은 매우 팽창하고 대중운동의 면모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은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각 부분운동과 지역운동이 성장하면서 이를 통일적으로 이끌어 나가고자 하는 ‘통일전선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바탕으로 진보적인 학자들은 민중을 역사발전의 주체로 설정하였다. 이들은 역사를 만드는 인간은 영웅이 아니라 생산 활동을 담당하는 ‘생산대중’이라고 생각했고, ‘생산대중’은 사회변혁운동의 방향과 완수를 결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힘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 예로 조선후기의 경제적 변화를 들었다. 조선왕조의 중세적인 경제체제를 근저로부터 무너뜨린 농민층의 양극분해 현상은 직접생산자인 농민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19세기 빈번히 발생했던 민란을 통해 민중이 저항주체로서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나. 민중사학의 한계 민중 중심의 역사 해석은 사회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80년대에 주목을 받으며 성장하였지만, 90년대에 들어서자 변혁 운동의 열기가 수그러들면서 퇴조하게 되었다. 이는 70~80년대 민중사학이 가지던 다음과 같은 한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민중’이라는 역사적 행위자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지가 않다. 70년대 민중론은 민중 자체에 의해 형성된 개념이라기보다는 실천운동을 위한 전략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에 가까웠다. 허영란, 2005, 민중운동사 이후의 민중사 : 민중사 연구의 현재와 새로운 모색 역사문제연구, 역사문제연구소, 304쪽. 즉, 민중이라는 개념이 부여된 사람들이 실천운동을 벌인 것이 아니라, 실천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에게 민중이라는 개념을 부여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민중의 다원성을 간과하고 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약자에 해당되는 민중은 여러 갈등관계에 얽혀있는 다양한 계층의 결합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통일된 의식보다는 각자의 계층에 처한 이해관계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70~80년대 민중사학에서는 이런 차이는 극복되어야 하고, 지배층에 맞서기 위해 단일한 저항주체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저항주체로서 활동하지 않는 민중의 삶은 역사서술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고, 민중운동사는 실재해 온 민중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위의 논문, 307쪽. 셋째, 민중운동을 주도하는 운동가의 영향력을 고려하지 않는다. 영웅주의 역사학의 관점을 따르자면, 민중운동을 주도하는 운동가는 위인이나 영웅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민중들이 스스로 민중운동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외‧내부의 지도자에 의해 조직되는 경우를 간과할 수 없다. 이럴 경우 운동을 지도하는 사람의 역량에 따라 운동의 성격, 양상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결정적으로 넷째, 현재 대중의 움직임을 설명하지 못한다. 90년대 이후 민중사학은 벽에 부딪히게 된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로 인한 공산주의적 진보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것이 그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민중에 대한 신화 해체도 한 몫 하였다. 정무용, 앞의 논문, 168쪽. 87년 6월 민주항쟁의 성과로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게 되었지만, 민중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뽑은 대통령은 군부의 후계자였다. 이는 민중사학의 예상과는 어긋나는 현상이었기에 민중사학은 그 힘을 더욱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장에서는 70~80년대 한국에서 발달했던 민중 중심의 역사관과 그 문제점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물론 그 시대의 한국뿐만 아니라, 긴 역사 속에서 세계적으로 민중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한 경우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제시한 민중론의 한계와 더불어, 현재 대중들이 단일한 저항의식을 갖기 보다는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볼 때, 이들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말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5. 무엇이 역사를 움직이는가 지금까지 역사의 원동력을 설명하는 이론을 크게 세 범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각각의 이론이 모두 특정한 지점에서 한계를 가지는 만큼, 하나의 이론에만 치우쳐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우를 범하기 쉽다. 특히나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설정하는 문제는 앞으로 역사는 어떻게 발전해 나가야 하는지, 역사적 인물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와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기에 더욱 중요하다. 경제적 구조에만 입각하여 역사를 설명하는 경우, 민중이나 지도자의 잘못된 행동을 ‘거스를 수 없는 경제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 해석하여 면죄부를 제공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고, 지도자의 역량에만 입각하여 역사를 설명하는 경우, 지도자의 공적을 숭배하는 태도에 빠질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어떻게 설정하는 것이 합당할까? 앞서 간단히 논했듯이 세계는 이제 더 이상 지도자 한 명을 바꾼다고 그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구조는 정치‧경제분야뿐만 아니라 학문과 이념, 사상에도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70년대 이전 케인즈 주의에 의해 경제 성장을 이룩하고 있을 때에 등장한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 이론은 철저하게 무시되었지만, 70년대 경제 위기 이후 하이에크의 이론이 비판 없이 받아들여진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수정은 자본주의가 경제학을 선두로 한 여러 학문의 도움으로 문제점을 고쳐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브레튼 우즈 체제의 붕괴나 신자유주의 등장 이후 무분별하게 확대되는 금융세계화 과정을 살펴보면 자본주의의 수정이 과연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선의’의 목적만을 가지고 이루어졌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정병욱, 앞의 논문, 41-43쪽. 경제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이 스스로 자본주의를 보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학계의 학자들과 사상이 자본의 이윤율 상승과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되었다고 보는 게 더 합당할 지도 모른다. 물론 자본주의 구조 자체가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고 움직이는 존재는 아니다. 그 구조를 움직이는 존재는 역시 사람이라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주목할 것은 여기서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것이 정치적인 지도자나 민중이 아닌, 자본을 가진 자를 뜻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오늘날 이와 같이 움직이도록 만든 장본인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본을 투자‧투기한 사람들인 것이다. 세계화와 FTA, 금융자본주의의 등장, 기업의 초국적 확장 모두 이들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등장 이래로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자본주의 구조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경제적 지배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앞서 말한 ‘경제적 지배자’에 속하지 못하는 나머지 사람들이 역사에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자본의 성격상 자본은 필연적으로 노동자를 요구한다. 자본은 스스로 잉여가치를 창출해 낼 수 없기에, 외부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잉여가치를 착취함으로써 증식할 수밖에 없다. 즉, ‘경제적 지배자’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지배’받는 민중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민중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구조에 관철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갖는다. Occupy Wall Street 운동이나 반값등록금 투쟁은 그 목표한 바를 모두 이룬 것은 아니지만, 정치권의 이목을 끌어내고, 법안을 상정하게 만드는 등 구조적인 변화에 한 발짝 다가가게 만들었다. 이처럼 미미하지만 ‘지배’받는 민중 역시 ‘경제적 지배자’들에 맞서 역사를 움직이는 또 다른 주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 Seligman, The economic interpretation of history (1917, c1902) ; 현대문화연구회 옮김, 1979 경제사관의 제문제, 한마당. ■ Sidney Hook, The Hero in History: A Study in Limitation and Possibility, 1943, Beaco Press ; 민석홍 역, 1982 역사와 인간, 을유문화사. ■ 박진원, 2008, 칼라일과 에머슨의 영웅관 비교 영어영문학연구 34, 대한영어영문학회. ■ 정무용, 2011, 민중과 역사: 1970년대 이후 민중사의 추이와 민중상의 변화 인문과학연구 16,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 ■ 정병욱, 2000, 신자유주의로부터 자유로운 통일국가를 바라며 내일을 여는 역사 1, 내일을 여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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