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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분스페셜] 교과서 논쟁을 통해 본 역사학 경시 풍조

적분史

by ∫2tdt=t²+c 2015. 10. 29.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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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사회에서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되었으니 정정하여 바른 교과서를 편찬해야한다는 주장과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시대를 역행하는 독재정권스러운 일이라고 반발하는 주장이 치열하게 맞서고 있죠. 근데 사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교과서 편향성 관련한 논쟁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분야는 조금 다르지만 이미 앞서서 교과서 내용이 편향되어있다며 고쳐야한다는 주장이 2012년에 등장했었죠! 두둥 바로 교진추(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가 일으켰던 과학 교과서 진화론 편향 논쟁입니다.


2012년 초부터 교진추는 과학 교과서가 진화론 편향적으로 서술되었다고 주장하며, 교과서에서 진화론과 관련된 잘못된 내용들을 삭제할것을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 과학 교과서 진화론 관련 부분에서 시조새, 말의 진화 등의 내용이 삭제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실제로 교과서 출판사 측에서도 시조새 관련 내용을 삭제하겠다고(뉴스기사) 발표하면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가 될뻔했죠. 다행히도 국내 여러 생물학계 단체들이 반발하며 성명문을 내고 교과부에 청원서를 넣는 등 반발한 덕분에 진화론 내용은 과학교과서에서 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득 이 사건이 생각난 이유는 이때 교진추의 주장이 지금 상황과 유독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진추의 주장은 '국내 과학 교과서 편찬진들이 대부분 진화론에 찬성하는 세력으로 편향되게 구성되어있어서 잘못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과학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빼는 것에 실패하자 교진추는 과학 교과서를 직접 만드는일에 착수했는데, 편찬진은 역시 그들주장대로 공정하게 "목사들과 (창조)과학자들"로 구성되었죠.


그렇다면 여기서 고민해봐야할 것은 진정으로 '올바른' 과학 교과서는 어떤 것인가입니다. 그들 주장대로 진화론 내용만 실은 것이 편향된 교과서라면, 진화론과 창조론을 모두 실어야 바른 교과서가 되는 것일까요? 생물학자들로만 편찬하면 진화론에 편향되니 생물학자와 목사 등 다양한 학계(종교계)의 인사들을 두루 갖추어야 바른 교과서가 되는 것일까요?



현재 역사 교과서와 관련해서도 같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역사 교과서 편찬진들이 대부분 좌편향이라서 좌편향적인 교과서가 만들어졌다는 주장, 더 나아가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편향되었다는 주장(뉴스기사), 그러니 국정 교과서는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헌법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모여서 만들 것이라는 이야기(뉴스기사)를 보면 정말 과학 교과서 논쟁 때와 똑 닮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죠. 과학 교과서 때는 주체가 (그나마 작은) 교진추라는 단체였고, 논란도 그다지 크지 않았고, 사회적으로도 일부 광적 개신교도들의 난리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권이 주체이고, 정치권이 합세하면서 논란도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정부에서 직접 진행하는 일이어서 그런것인지는 몰라도, 국민들의 의견도 팽팽하게 갈리고 있습니다. 과학 교과서 논쟁때만해도 대중적 여론은 교진추는 쓸데없는 짓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아마 광적인 개신교도들에 대한 악감정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 교과서에 대해서는 범여론적인 일치가 없다는게 이번 글의 핵심포인트입니다.


분명 역사 교과서는 역사라는 학문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에 관한 논쟁이 아닌 좌-우 정치권의 정치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역사학이 그만큼 제대로된 학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과학 교과서를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목사 등의 종교인, 과학 비전공자들이 쓰겠다고 하면 국민적인 반대가 일어나겠지만, 역사 교과서를 역사학자들뿐만 아니라, 타 전공자들이 함께 쓰겠다고 하면 수긍하는게 현실이라는 거죠. 이는 역사학은 굳이 전공자가 아니어도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이라는 사회적인 인식이 보이는 지점입니다.


역사학자들 대부분이 편향되어 있다는 주장에서도 역시, 사학에 대한 경시를 옅볼 수 있습니다. 역사라는 분야에서 몇 십년 동안 공부를 해온 교수들의 주장이 단지 좌파라는 정치적 성향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 기저에 역사 연구를 통해 나오는 인본적 가치관, 사회관, 국가관이 있을 거라는 인식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윗분들은 역사라는 것이 정치적인 입맛에 따라 편하게 이리 쓰고, 저리 쓸 수 있는 것이라는 편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학문에서 올바르다는 것은 없습니다. 과학도 그렇고 역사도 그렇고 수많은 학문들이 그러하듯 학문은 외부의 어떤 대상에 대한 논리적인 해석입니다. 과학 법칙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해서 과학자들이 그것을 발견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 법칙은 수많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외부 세계인 자연이 움직이는 이치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어서 채택되는 것이죠. 당연히 자연세계를 설명하는 법칙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생각하는 천동설,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생각하는 지동설, 두 학설은 모두 관찰되는 태양과 행성의 움직임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지동설이 천동설보다 더 간단하면서도 강력하게 그 움직임을 설명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지동설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인류가 지구 밖을 나서게 되면서 실제로 지동설이 옳음이 증명되었죠.) 물론 천동설을 지지하는 학자(사이트 링크)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의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은 하나 이상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옳다고 생각하던 학설들도 시간이 흐르고 학문이 발전함에서 따라 문제점이 발견되고, 더 강력한 이론으로 대체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뉴턴의 물리법칙을 밀어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만 봐도 그러하죠. 지금 우리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학설들도 시간이 지나면 바뀌게 되겠죠. 그렇기 때문에 학문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올바른 학설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과서에 올바른 내용을 담겠다는 이야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고, 위험한 주장이 되는 것입니다. 교과서는 학계에서 주로 통용되는 학설, 논란의 여지가 가장 적은 학설을 싣는 것이지 올바른 학설을 싣는게 아니란 것입니다. 균형있는 교과서, 올바른 교과서를 편찬하겠다고 지구과학 교과서에 지동설과 천동설을 모두 올리는 것은 지성의 발전을 저해하는 일일뿐입니다.


역사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 사건을 기술하는데 수 십가지 학설이 있지만, 그 이론들을 모두 싣는다고 균형 있는 교과서가 되는게 아닙니다. 정권이 진정으로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편찬하고 싶다면, 학계가 편향되어있다고 주장하며 정치가 학문에 관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역사학에 사회적으로 더 많은 투자를 해 더 깊이 있는 역사연구가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학문이 발전하면 교과서에서 자연스레 잘못된 내용은 빠지고 더 정교한 학설이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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