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아. 드디어 21개월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당당하게 전역했습니다. 언제 전역하나 손가락만 빨면서 있던게 엊그제 같은데 금세 전역이 와서 신기방기하네요. 군대가면 아무것도 못하게 정체되어서 멍청해질줄 알았는데, 오히려 많은 것을 배워올수 있는 시간이었네요! 장담은 못하지만, 적어도 제가 봐왔던 전역자들 중에서 제가 최고로 보람찬 군생활을 했다고 감히 조심스레 자랑해봅니다. 군생활에서 얻어온 것들을 적어보면서 21개월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다른 사람들도 많이 얻어오는 것들부터 정리해봤어요.
* 몸무게 +10kg
규칙적인 생활과 삼시세끼 꼬박꼬박 챙겨먹은 식사, 그리고 야간근무 후 먹었던 야식 덕분에 10킬로그램이나 몸을 불려 왔습니다. 이 얼마나 많은 것을 얻어온것입니까! 상대성 이론 E=mc^2 에 따라 질량은 곧 에너지가 되므로, 이 10킬로그램은 사실 어마어마한 양의 에너지인것입니다. 214,810 킬로톤의 TNT 폭발에너지와 맞먹는 질량을 얻어온것이지요... (ㅠㅠ)
* 우물 안 개구리 탈출
학교 다니면서 늘 보던 사람들만 보다가 입대한 저에게 군생활은 가히 문화의 용광로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출신 성분 막론하고 골고루 20대 남성들이 모였으니까요. 내가 봐오던 세상이 얼마나 좁았는지, 20대 한국 남성들이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 느낄 수 있는 좋은 공간이었습니다. 그런 생각 중에 바람직한 것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지만, 다 좋은 경험이 되었다고 봅니다.
* 21개월치 월급 -> 새 컴퓨터, 휴대폰
담배도 안 피고, 방공진지 특성상 PX 이용도 거의 못했기 때문에 월급이 자연스레 쌓이더라구요. 모은돈으로 전역하면서 새 컴퓨터도 맞추고 휴대폰도 바꾸고 했습니다. (근데 이렇게 써버리니 그동안 모은 돈이 순삭... 21개월 노동의 댓가가 한 순간에 사라지니 마음 한편이 씁쓸하더라구요)
군생활이 심심하다 보니 자연스레 공부가 하고 싶어져서, 공부도 열심히 해봤습니다.
* 라틴어 공부 (OLC III 통독)
후반기 교육 때부터 라틴어 교재를 쭉쭉 읽어나갔습니다. 엄청 공부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이거 읽기만해도 재밌더라구요.
* 헬라어 공부 (Athenaze I 통독)
자대 와서부터는 헬라어 교재를 읽어봤습니다. 2012년도 여름에 공부하다 때려친 거였는데, 부대에서 18개월정도 껴앉고 씨름하다 보니 이제야 드디어 헬라어라는 언어가 어떤 언어인지 감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구요... 아직도 사전 없으면 쉬운 문장 하나도 해석못합니다.)
* 형태론 공부 (형태론 교재 통독)
15년도부터 공부한 교재인데, 이 공부내용을 바탕으로 MorPHP를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 TAOCP 공부 (TAOCP 1,2권 통독)
북한이 열심히 도발하던 15년의 어느날에 그냥 갑자기 읽고 싶어졌는데, 지인분이 남는책이 있다고 흔쾌히 보내주셔서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1,2권 읽기는 다 읽었는데, 무슨 내용인지 반도 이해못했을 겁니다. 지루한 군생활을 날려준 소중한 친구였습니다. 어려운 문제 하나 붙잡고 있다보면 시간이 금방금방 가더라구요.
* 로마사 공부 (몸젠의 로마사 1,2권 통독)
전공이 역사인데, 역사 공부는 너무 안하는거같아서 공부하려고 몸젠의 로마사 1, 2권을 사서 읽었습니다. 재미있어요. 근데 기억이 안 나는게 함정
하지만 제 군생활의 꽃은 개발이었던거 같습니다. 군대에서 이런걸 할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사지방을 잘 활용하면 의외의 것도 가능하다는거! 신병 휴가 복귀하기 전날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PHP 서버단에 PHP 코드를 수정할 수 있는 에디터를 넣어놨습니다. 만약 홈페이지에 긴급한 문제가 생기면 수정할수있게요. 그런데 이 에디터를 통해 더 기능이 강화된 에디터를 작성하고, 그 에디터를 통해 웹에서 동작하는 FTP를 올리고, 각종 기능들을 추가하면서 결국에는 PHP 상에서 HTML/CSS/JS/PHP 개발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내고야 말았습니다. (의지의 군인!)
평일은 하루에 최대 30분 정도, 주말엔 최대 2시간 정도 이용할 수 있는 사지방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컴퓨터 상에서 코딩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했습니다. 노트에 미리 설계를 하거나, 손코딩을 해보는 등 사전에 준비할 수 있는건 다 준비했죠. 사지방엔 앉아서 바로 코딩에 들어가야했으니깐요. 만약 사지방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버그가 안 잡히는 경우, 사지방을 끝내고 돌아와서 머리속으로 코드를 실행해보며 어느 쪽에 문제가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정말 번거로운 작업의 연속이었는데, 의외로 좋은 행동이었나봅니다. 미리 설계를 함으로써 잘 짜여진 코드를 작성할수 있게되었거든요. (그리고 의외로 정말 예상치 않은 때에... 예를 들어 근무중이라던지 샤워중, 또는 자려고 누워있는 도중에 어느 지점에서 버그가 있었는지 문득 떠오를때가 많았습니다. 컴퓨터를 오래붙잡고 있는것보다는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고민해보는것도 괜찮은거같아요!)
개발 업적리스트입니다.
* 라틴어 사전 제작, 16000 단어 번역
군생활의 메인이 된 작업이죠. 신병 휴가때부터 시작해서 전역 전날까지 작업했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대부분의 프로젝트 갈래들이 여기서 갈라져 나온거에요. 별다른 서비스도 없던 살아있는 라틴어 홈페이지의 제일 중요한 서비스가 되어버렸습니다. 일병 때 사지방에서 한 단어 한 단어 번역하고 있는 저를 보고 선임들이 금방 포기하고 다른거 하게될거라고 했었는데, 결국 포기 안했습니다!ㅎㅎ 약 16000개의 단어를 번역해냈습니다. (전체 단어가 21000개인데, 5000개 정도가 아직 번역이 안된것이죠. 그리고 사실 16000개중 6000개는 아래의 자동번역 기술을 통해서 번역된거라...)
* 라틴어 코퍼스 구축, 50000 문장 수집, 600문장 태깅
훌륭한 사전이 만들어지려면 코퍼스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라틴어 문장들을 닥치는 대로 수집했습니다. 이게 코퍼스 관련 실험의 시작이 되어버렸네요. 처음에는 그냥 문장 목록이었는데, 품사 태깅도 하고, 뜻풀이도 달고, 인덱스도 생성하면서 여러가지로 복잡한 일이 됐습니다. 군생활 중에 약 50000문장 수집했고, 그 중에 600문장은 수작업 태깅을 완료했습니다. 앞으로는 자동 태깅을 실시할 예정이구요.
* 자동번역 실험
매번 라틴어 사전 표제어 번역할때마다 비슷한 단어가 자주 나오길래, 그동안 번역한 단어를 학습자료로 삼아 학습시키면 앞으로 나올 비슷한 단어를 자동 번역할 수 있지않을까 하는 마음에 만들어보았는데, 생각보다 결과가 괜찮아서 유용하게 쓰고 있네요. 이 기술로 라틴어 사전의 미번역 표제어 6000단어를 자동 번역했고, 헬라어/히브리어/스와힐리어 사전은 자동번역으로 대부분의 표제어를 번역했습니다. 약 90000쌍의 한국어-영어 단어쌍을 구축했고, 그중 약 6만 개는 수작업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나머지는 wiktionary 의 한국어 단어 표제어를 크롤링해서 만들었구요.)
2015/08/01 - [프로그래밍] - 사전 표제어 뜻풀이의 자동 기계 번역(PHP, MySQL)
* 유의어 추출 실험
사전에서 비슷한 뜻의 단어를 추천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시작했습니다. 제겐 문정과 수업에서 배웠던 TF-IDF를 실제로 처음으로 써먹은 사례가 되겠네요. 라틴어/헬라어 사전에 시험 적용해보았고, 문제점을 보완해서 나머지 사전에도 적용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과 제 관심이 금방 떨어져서 거기서 멈춰버렸어요.
2015/05/03 - [프로그래밍] - 문헌 클러스터링 기술을 이용한 유의어 분류(PHP, MySQL)
* 형태소 분석/합성기 개발 (MorPHP)
사전 개발 중, 형태소 분석/합성 모듈을 쉽게 작성하기 위해 개발한 도구입니다. 처음 라틴어 사전을 개발할때는 부대내에서 한정된 사지방 시간 안에 작업을 하려다보니 정말로 지저분한 코드를 남발하게 되었는데 (특히 파싱 부분은 이쁘게 짜기가 쉽지 않죠. 자꾸 비슷한 코드 반복되는거 같아서 짜증도 나고) 헬라어 사전을 만드려고 보니 이런 짓을 또 할 자신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이 부분을 아예 MorPHP라는 형태 규칙 서술언어로 작성해서 PHP/JS로 번역하기로 마음먹고 빡세게 개발해서 이런 결과물을 내게 되었습니다.
2015/11/15 - [프로그래밍] - 형태 규칙 서술 언어 MorPHP
* 헬라어 사전 제작
라틴어 사전 제작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헬라어 사전 편찬에도 뛰어들어봤습니다. 그당시 저는 제가 어느정도 헬라어를 할줄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 이런일이 가능했던거죠. 개발하면서 제 무지에 무릎을 탁 치고 말았습니다. (저는 헬라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기초적인 부분은 서비스할 수 있도록 완성하긴 했습니다.
* 코퍼스 분석 툴 개발 (KorpuSQL)
계획은 오래전부터했는데 시간적으로 여의치 않아서 늦게 개발된 경우입니다. 대규모 코퍼스를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PHP가 아닌 로우 레벨 언어가 필요했으니까요. 결국 말차 나와서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2016/01/27 - [프로그래밍] - 코퍼스 분석용 SQL도구 KorpuSQL 개발!
* 웹 크롤러 + 검색엔진 실험 (LMC)
원래 처음 출발은 라틴어 코퍼스 자동 구축을 위해서 만든거였는데, 하다보니 검색 엔진 크롤러랑 기능이 너무 똑 닮아서, 그냥 크롤러로 바꿔버렸습니다. 수집은 그냥 크롤러 풀어놓고 이곳저곳 돌아다니게 하면 되는거니깐 어려운게 없는데, 그 수집된 문장들에서 사용자가 원하는 정보를 뽑아내는게 어렵더군요. (하긴 이게 쉬웠으면 개나 소나 구글 차리고 있었겠죠?) 나름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동원해 직접 검색엔진이란 걸 만들어보는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구글에 관한 책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히브리어 사전 제작(중...)
* 스와힐리어 사전 제작(중...)
MorPHP로 다양한 언어의 형태 규칙을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극과 극인 언어 두 개를 골랐습니다. 그래서 만들기 시작했는데, 아직 완성이 안되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기약이 없습니다... 제가 전역을 해버렸기때문에
사실 21개월 군생활을 안했다면 이런짓을 했을까 싶습니다. 물론 민간인이었다면 더 많은 시간을 개발에 투자할 수 있었을테니 21개월동안 할 작업을 3개월 만에 끝낼 수도 있었겠죠. 근데 더 확실한것은 민간인이었으면 그 작업을 3주안에 관뒀을거라는 것입니다. 밖에 얼마나 재미있는게 많은데요! 가끔씩만 재밌는 개발을 3개월 내내 지속할만큼 제가 끈기력이 안되었을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군대라는 환경이 자연스레 상대적으로 개발을 재밌는것으로 만들어줘서 (별 문제가 없으면) 하루 30분씩 꼬박꼬박 개발을 하게 되었죠. 이걸 좋다고 봐야할지...
혹시나 이 글을 읽고 계신분들 중에 아직 미필자가 계시다면, 군대를 인생을 낭비하는 곳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21개월을 낭비하고 말고는 입대한 본인에게 달려있는거죠. 노력한 만큼 많은 것을 얻어올 수 있는 곳이 군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배운것중에 가장 큰것은 이겁니다. 예전에 1년 넘게 차이나던 맞선임이 전역하기 전에 해주고 간 말인데, 정말 큰 울림이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때 당시의 멘트가 아래와 완전히 같진 않습니다. 제 기억과 추억 속에서 적당히 재구성되었음을 밝힙니다.)
(불시 점검에 대해) 선임이라고 걱정이 안되고, 두려운게 없을거 같지만 똑같다. 아무리 짬을 먹고 잘하게 되도 그들도 똑같이 두렵고 걱정이 된단 말이야. 그런데도 두렵거나 걱정하는 기색을 안 보이는거지. 왜냐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 후임들은 더욱 긴장하고 두려워할테니깐. 그래서 애써 태평한척, 걱정 안하는 척 하는거야. 후임들이 안심하고 의지할 수 있게.
후임들이 의지할 수 있으려면 그 선임은 그만큼 더 잘하고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단히 노력해야하는거야. 종종 힘든 일도 있겠지만, 니가 힘들다고 포기하면 니 후임은 더 힘든 길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 힘들고 무너질거 같아도 후임들을 위해서라도 꾹 참고 이겨낼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지만, 더욱 노력해서 후임들이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선임이 되길 바란다.
이 말을 듣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고, 그 덕분에 제 군생활이 의미있고 보람찬 군생활이 될 수 있던것 같아요. 이 마인드는 전역 후에도 큰 의미를 가집니다. 앞으로 친구들, 후배들, 가족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의지하고 기대어 갈 수 있는 큰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능력을 갈고 닦고 공부하려고 합니다. 최선을 다해 앞으로의 인생 살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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