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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의 L자도 모르던 사람이 라틴어 덕후가 되기까지.

적분史

by ∫2tdt=t²+c 2015. 12. 17.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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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전통이란 것들이 실제로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것처럼, 지금 라틴어로 덕질하는 저의 모습도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어쩌다 보니 (주력) 취미생활이 되어버렸지만, 몇년전만 해도 외국어 가지고 덕질을 하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죠. 그래서 한 번 시간을 내서 저 자신이 어쩌다보니 굉장히 마이너한 언어인 라틴어를 좋아하게 되고 빠져들었는지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라틴어를 제일 처음 접한때는 아마 초등학생 때 쯤이었을텐데, 성당에서 성탄절이나 부활절 때 종종 라틴어로 대영광송과 같은 미사곡을 부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근데 이때는 그냥 '고대에 쓰던 라틴어라는 언어가 있었고, 지금도 교회에서는 가끔 사용되는구나~'하고 받아들였을뿐이지 공부해보고 싶다던가 호기심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친숙한 영어로 써져 있는 문장보다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로 써져있는 문장이 더 멋있어보이기는 했습니다. 오죽하면 

Quidquid latine dictum sit altum videtur. 

무엇이든 라틴어로 쓰여있으면 심오해보인다.

는 라틴어 문구가 있겠습니까!


아무튼, 실제로 라틴어를 공부하게 된 것은 대학 입학 이후입니다. 저희 학교 문과대에는 제2외국어 수업을 6학점 이상 들어야한다는 졸업요건이 있어서, 졸업을 위해서는 제2외국어를 들어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자신들이 배웠던 제2외국어를 대학와서도 이어서 배워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중/고등학교 다닐 때 중국어를 제2외국어로 배웠기 때문에 자연스레 중국어를 들어야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교양으로 열리는 중국어 수업은 그 과정에 따라 중국어1, 2, 3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중국어1을 듣고자 해당 수업 실라버스를 찾아보니 '중국어를 1년 이상 배운 학생은 중국어2를 들을것'이라고 명시되어 있어서, 아무 생각없이 중국어2를 듣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때 뭐 얼마나 대단한 중국어를 배웠겠습니까, 또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 시간은 말만 제2외국어 시간이지 다른 수업 내용 보충하는 자습시간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래도 저는 제가 중국어를 1년 이상 배웠다고 생각했던거죠. 사실 1년 이상 배운 사람은 중국어2를 들으라는 이야기는 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외고 등을 다니며 중국어를 공부한 사람들을 향해 하는 이야기였다는 것을 전혀 알지도 못한채...


수업 첫날은 평온했습니다. 교재를 뒤적거려봤는데, 다행히도 어느 정도 이해할수 있는 이야기들이고, 열심히 공부하면 충분히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넘쳐났죠. 같이 수업듣는 학생들 수준도 저랑 크게 다르지 않은거 같아서 다행이었습니다. 이 학생들이 양의 탈을 쓴 늑대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수강신청 변경기간이 끝나자마자, 다들 본성을 드러내며 진짜 중국어 실력을 드러내기 시작했거든요. 알고보니 저만 빼고 나머지 모든 학생들이 1. 중국 유학파 출신 2. 외고 중국어과 출신 3. 중문과 학생 4. 중국인(...) 네 가지 부류 안에 들었습니다. 저만 일반계에서 술렁술렁 중국어를 배우고 온 사람이었던거죠! 다들 이미 중국어2를 들을 실력을 넘어가는 학생들이었습니다. 심지어 교수님마저 중국인이라서 수업시간은 중국인들과 중국 유학파들과 중어전공자들이 신나서 서로 중국어로 떠드는 판이 되었습니다. 저는 혼자 구석에서 애써 알아듣는척(다른 사람들이 웃을때면 같이 웃고, 숙연해질때면 같이 숙연해지면 됩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해하겠다는 식의 리액션도 필수.) 쭈구리처럼 있으면서 수업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대학 새내기. 순수와 열정의 끝판을 달리던 때라서, 아무리 내가 뒤쳐지고 있어도 열심히하면 남들처럼 자유자재로 중국어 스피킹을 하는 날이 올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죠. 요즘식 표현으로 말하면 '노오오오오력'만 하면 승산이 있다고 오판한 것입니다. 교수님께서도 제가 열심히하는 것을 보고 칭찬하고 기특해하셨습니다. (어쩌면 한국어로 칭찬하면서 중국어로는 다른 얘기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중국어는 못알아들었으니깐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한 학기가 지나고 성적이 나올때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학생은 정말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가 좋았다. 그런데 상대평가이다 보니 줄 수 있는 성적이 이거 밖에 안된다. 한 학기 동안 고생했다.

- 중국어 수업 교수님, 학점 C+을 주시며.

그때야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노오오오오력을 해도 유학파와 원어민은 쉽게 따라잡을수가 없구나. 고민과 번뇌에 싸였습니다. 중국어2를 들었기때문에 졸업요건을 채우기 위해서는 중국어3를 들어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게 아니면 중국어를 버리고 다른 외국어를 다시 6학점 듣거나. 그런데 중국어3 수업 모습은 차마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중국어3 수업 속 제 모습은 캐리어와 배틀쿠르져가 날아다니는 전장 속 홀로 남겨진 저글링 한 마리...일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외국어를 갈아타야겠다고 생각하고 교양으로 열리는 외국어 수업을 뒤적거려보았습니다.


* 일본어: 일문과는 없지만, 외고 일어과 출신들과 오덕으로 중무장되어있음.

* 독일어: 독문과 학생들과 외고 독어과 출신에게 점령.

* 프랑스어: 불문과 + 외고 불어과

* 러시아어: 노문과 + 외고 노어과

* 스페인어: 서문과는 없지만, 외고 스페인어과 출신이 점령

* 아랍어: 의외로 아랍덕후들이 있어서 준비없이 가면 털린다는 소식...

* 한문: 외울 생각하면 그냥... 그리고 한자1급이 한문1을 듣는다는 소문도 있었음.

* 라틴어: ...?!


그때 눈에 들어온 수업이 라틴어였습니다. 사어기 때문에 원어민은 당연히 없을거고, 자연히 유학파도 없고, 그 어느 외고에서도 가르치지 않는 청정 구역이었습니다. 마침 어렸을적부터 종종 구경은 했기때문에 낯은 조금이나마 익었고, 회화를 할 필요가(정확히는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말하기/듣기에 취약한 저에겐 유리해보였습니다.


(그때 라틴어를 들을 생각 안했다면 아마 다른 외국어 수업에서 쳐발리고 외국어에 대한 흥미를 영영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1학년 2학기때 라틴어를 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나선, 바로 여름방학에 도서관에서 라틴어 교재를 빌려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교재가 성염교수님의 라틴어 첫걸음이었습니다. 반쯤 읽다가 의지력이 약해져서 그만두기는 했는데, 적어도 라틴어가 어떻게 돌아가는 언어인지는 알게되었으니 그정도로 충분한 예습이 되었다고 생각했죠. 

드디어 기다리던 2학기 개강이 오고, 라틴어1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예상보다 수업은 훨씬 더 재미있었습니다. 미리 예습을 해간 덕에 수업 내용 파악도 잘 되었고, 무엇보다도 라틴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다른 수업처럼 '학점을 따기 위해' 수업을 들으러 오는것이 아니라, 정말 라틴어가 공부하고 싶어서 온 학생들이었기에 수업 분위기도 훨씬 좋았습니다. 교수님도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보기 드물게 3박자가 다 맞아들어간 수업이라 할수 있겠죠.


즐거이 라틴어 수업을 들으면서, 라틴어 공부를 원활히 하기 위해 몇가지 프로그램도 개발했습니다. 라틴어 단어를 쉽게 외울 수 있게 도와주는 BlinkMemory (깜빡이 학습기와 비슷한 녀석. 여러 개의 단어를 주기적으로 번갈아 가며 보여줘서 금방 외우게 만들고, 평가보는 기능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도 개발해서 같이 듣는 학우들에게 뿌렸습니다. (물론 다들 얼마나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1학년 2학기는 샤르르 지나가고, 라틴어1 수업 성적이 궁금해서 교수님께 메일을 드렸는데...

답이 너무 늦어 미안합니다.

점수가 이제야 나왔습니다.

기말고사 점수는 96점 나오셨네요. 기말고사에서 1등 하셨습니다~!!

성적은 오늘 이내로 입력할 것이니 내일 확인하시면 되겠습니다.

 

한 학기 동안 라틴어 열심히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겨울 방학 알차게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틴어 교수님

그렇게 기분좋게 라틴어1을 A+로 마무리지었습니다.



BlinkMemory 프로그램의 모습


이런 식으로 단어 목록이 1.5초 간격으로 계속 갱신되며 나옵니다. 여러 번 반복해서 보게 되면 금세 외우게 되죠.



라틴어2는 수강생이 적어 1년에 한번 2학기때에만 열립니다. 어쩔 수없이 1학기를 기다리며, 도서관에서 라틴어2 교재를 미리 빌려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윈도용으로 개발했던 BlinkMemory 프로그램을 HTML/JAVASCRIPT로 포팅해서 웹에 올리는 작업을 했습니다. 비로소 스마트폰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던 때였기 때문에, 핸드폰으로 앱을 돌려 등하교하면서도 공부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죠. 그 당시 저는 웹쪽은 전혀 모르고, 윈도우 개발만 주구장창하고 있던 때라, 웹으로 포팅한 BlinkMemory는 정말 어설플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처음으로 스마트폰에서 돌리기 위한 웹앱이었기 때문에 저에겐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웹에 올라간 라틴어 단어 목록은 추후 라틴어 사전 프로젝트의 기반이 되었고,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1학기를 기다리고, 2학년 2학기가 되어서 라틴어2 수업을 듣게 되었습니다. 수강생은 20명이 채 안되는 수였지만, 모두 라틴어에 열의를 가지고 모인 사람들이었죠. 라틴어2가 되면서 난이도가 좀 급상승했고, 배울게 늘어나면서 수업시간이 빠듯해질 정도였지만, 다들 열심히 했습니다. 수업이 끝날때즈음 교수님께서 겨울방학을 이용해 라틴어3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이 있냐고 물어보셨습니다. 라틴어3는 좀처럼 수강생이 모이지 않아 수업 개설이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에, 배우고 싶어도 배울수가 없는 수업이었거든요. 교수님께서는 희망자가 5명 이상 모이면, 별도의 수강료 없이 한 달 동안 4차시에 걸쳐 강의를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전 희망자가 5명 넘을지는 고려도 안해보고 교재부터 주문했습니다. Oxford Latin Course III 였는데 국내에 파는 곳이 없어서 무려 해외배송을 질렀습니다. 다행히도 8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희망해서 교수님께선 라틴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많다는것에 기뻐했고, 학생들도 라틴어를 더 배울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죠.


겨울방학 때 라틴어 수업을 들으려고 학교를 나오는데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단지 라틴어 하나만을 위해 왕복 4시간 통학을 하는거였는데, 아마 저 말고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을겁니다. 정말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배우길 원하는 사람들이 모인 수업처럼 보람차고 즐거운 수업은 없을겁니다. 하루 4시간인가 수업했는데, 1주일 중 그날만을 기다리면서 방학을 보냈죠. 그렇게 3주가 지나고 마지막 수업만이 남았습니다. 어쩌다보니 당시 저는 성당에서 중고등학생 연극제 행사 감독을 맡아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수업이 아마 12년01월26일(목)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 연극제가 27일이었습니다. 준비때문에 수업들으러 학교 시갈을 낼수가 없었죠. 정말로 꼭 가고싶었던 마지막 수업이었는데, 가지못하고 눈물을 삼키며 성당에서 연극 리허설을 진행했습니다.


지금와서 안타까운 것은 당시 마지막까지 함께 라틴어를 공부하던 학생들이랑 말 한 마디도 못 섞어보았다는 것입니다. 신학과 여러 명이랑 사학 전공 다학원생 선배 등 재미난 조합이었는데, 숫기가 부족했는지 통성명조차 안 하고 수업만 끝나면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간게 너무나 아쉬워요. 마지막 수업 때 학생들이랑 교수님이랑 이야기도 나누면서 2년간의 라틴어 여정을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실패하고 만거죠. 그리고 라틴어 교수님께서는 서울대로 돌아간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원래 저희 학교엔 라틴어 관련 전공이 없다보니 전임 교수가 배정될 수가 없어서 외래 강사가 라틴어 수업을 맡는데, 그동안 라틴어를 가르쳐 주신 교수님께서 떠나시고, 새로운 교수님이 오신다는 거였습니다. 제대로 된 감사 인사도 못드렸는데...


그리고 다음 학기, 백양관을 돌아다니다가 어쩌다 라틴어 교수님을 마주쳤습니다. 너무도 반가워서 그동안 못 드렸던 감사인사도 드리고, 겨울방학 때 못 들었던 라틴어3 마지막 수업을 다시 들으며 배우고 싶다고 부탁도 드렸습니다. 그러자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아냐, 학생 이미 다 배웠어. 충분히 잘하잖아!

- 라틴어 교수님으 마지막 말씀

교수님의 말씀은 너무도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교수님의 말씀을 '이제 학생 스스로도 공부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으니,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스스로 더 공부해나아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는 교수님은 다른 학교로 가셨고, 다시는 뵙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종종 교수님이랑 열의에 넘치던 학우들과 함께 수업하던 그 때가 그립곤 합니다. 하나의 학문적 목표를 향해 모두가 함께 모여 공부하고 논의하는 그런 자리를 어떤 수업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어느새인가 학교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인 학점으로 평가되고, 진리 탐구가 아니라 좋은 학점 따서 잘 취업하기 위해 수업을 고르는 학생들로 가득차 버렸습니다. 그때의 그 행복한 순간이 그리워질때면, 예전해 공부하던 라틴어 교재를 꺼내 다시 훑어보곤 합니다. 라틴어 수업은 2012년 1월에 다 끝났지만, 그렇게 종종 라틴어 교재를 꺼내 공부하며 그리운 마음을 달래다 보니 어느 순간 더 이상 라틴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어버렸네요. 말그대로 덕후가 되어 버린겁니다.


그리고 13년 실연의 아픔을 이기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기 위해 만든 살아있는 라틴어 홈페이지(2013/04/15 - [언어/라틴어] - '살아있는 라틴어' 홈페이지 개설)를 필두로 덕질의 DB화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년후 14년 7월부터 덕질을 더 확장하고 배운 문헌정보학 기술을 쏟아부어서 사전 편찬 작업에 뛰어들었고,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Iam Mihi Lingua Latina 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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