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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경제와사회] 철기의 사용

수업노트/한국고대경제와사회

by 적분 ∫2tdt=t²+c 2013. 11. 6.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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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시작

진주 대평리 유적 : 청동기 시기 전쟁이 나타났음을 알수 있는 증거.

* 일본에서도 머리가 없는 유골, 두개골에 화살촉에 박힌 유골 등이 발견됨

국가가 성립되고 계급사회가 현상된 이후, 알 수 없는 요인들에 의해 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전쟁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알수없다

->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도, 경제적 이익에 의한 것인지, 지도자의 감정에 의한 것인지

-> 수 많은 요인 중 잉여 생산물의 축적과 그것을 약탈하는 과정도 있었을 것.

 

고구려, 신라: 조를 많이 재배했으리라 추정되어, 국가의 재정 기반으로 사용되었을것 

백제: 삼국 중 벼의 비중이 높았을 것이라고 추정(다루왕 3년, 국가에서 명령을 내려 벼농사를 장려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그렇다고 해서 밭농사를 대체할 정도로 월등히 높았던 것은 아님 

-> 즉 당시 밭농사의 비중이 높았다는 것과 밭농사는 육로를 통해서 전래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볼때, 당시 가장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가졌던 국가는 고구려였을것 

 

철제 농기구의 사용

기원전 1세기부터 따비, 괭이, 쇠낫, 쇠스랑 등의 농기구가 출토되기 시작함(기원후 3세기 이후부터 본격 출토됨). 하지만 삼국시대 초기에는 철제 농기구 사용은 제한되었을 것. 기원후 4~5세기 즈음에야 철제 농기구가 널리 확산되었을것. 

 * 광주 신창동, 창원 다호리 유적: 일부 철제 농기구와 다수의 나무 농기구가 발견됨 : 철제 농기구가 광범위하게 보급되기 이전. 신창동은 최초로 편충(기생충)알 분석 도입(정착생활과 함께 기생충이 증가하였다고 여겨지기에, 기생충알을 발굴해내는 것은 농경생활의 증거가 됨)


철기의 사용: 최초는 고조선 후기인 기원전 4세기 경으로 추정되나,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4~6세기라고 추정함. 

가야 무덤에서 발견된 30~40개의 철정 vs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1300여개의 철정: 신라의 압도적인 경제력을 보여준다.


생산력의 발전과 읍락사회의 변동

* 기존의 학설: 4~6세기 우경의 시작, 철제 농기구의 도입, 개간 면적 증가, 수리 시설 확충 -> 생산력이 발전하여 호민, 하호, 노비의 계층구조로 이루어진 읍락사회가 변동하고 중앙집권 체제가 갖춰진다. 

우경에 대한 논리는 1957, <<중국농학사>>에서 유래된 것. 철제 농기구과 우경를 도입하기 이전에는 집단적으로 농업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도입 이후 생산력 발달로 집단이 개인으로 와해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주장함. 이 주장은 춘추전국시대(BCE 4~5C)의 증거(문헌기록, 출토유물)를 바탕으로 한다.


* 선생님의 의문읍락사회 공동체가 무너진다는 것의 실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생산력 발전이 사회구조를 변동시켜야 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전개한 논리일뿐. 읍락 공동체가 해체되었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사회가 형성되었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후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무하다.

<<중국농학사>>에서 비롯된 우경의 논리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기엔 1000년이라는 시간의 차이가 있다. 만약 이를 인정하면 삼국은 중국보다 천 년 이상 기술적으로 뒤떨어졌다는 말인데, 이는 고조선 말기에 철기가 도입되고 고조선과 한이 비등비등하게 전쟁을 치뤄냈다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일본서기의 구절 "농기구를 얹혀둔 소를 잠깐 내버려두고 어디를 다녀왔는데, 사람들이 그 소에 얹혀진 농기구를 도살도구로 보고 소를 잡아먹으려는 줄 알았다는 것"

이 구절은 농기구를 얹혀둔 소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우경이 확대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이는데에 사용될 수도 있지만(전덕재 교수의 주장), 한편으로는 잡아먹으려고 여겼다는건 아직 우경이 보급이 덜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에도 사용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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