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7483647번째 평행 우주의 이야기로 시작해보겠습니다.
일본제국이 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했고 조선은 독립하지 못했습니다. 독립을 외쳤던 수많은 조선인들은 끔찍하게 죽었고, 남은 조선인들은 일본제국의 2등 시민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2등시민 조선인들은 반도에 산다하여 반도인이라고 불리고, 이에 대비하여 일본에 살던 1등시민들은 내지인이라 불렸습니다. 많은 반도인들은 강제로 징용당해 이곳저곳으로 끌려가 일하며 각지에 반도촌을 이루게 되었구요.
세월이 흘러 인권과 평등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자 반도인과 내지인 간의 차별은 금지되었고 법적으로는 평등한 세상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차별이 백 년 넘게 이어지는 동안 가랑비에 옷 젖듯 일본어에서 '내지'라는 표현은 좋은 것, 지배하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의 단어로, '반도'라는 표현은 나쁜 것, 지배당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로 의미가 확장되었고, 그 결과 다양한 곳에서 범용적으로 쓰이는 표현이 되었네요.
일본은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IT 산업을 최초로 일으켰습니다. 컴퓨터를 비롯한 다양한 전산 기술이 태동했고, 그것들을 구동하기 위한 프로그래밍 언어도 만들어졌습니다. 어느덧 이것들은 사실상 세계 표준이 되어 여러 나라에서 쓰이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다국적 IT 기업들도 여럿 등장했네요. 그 기업에서는 반도인의 후손들과 내지인의 후손들이 (법적으로는) 차별 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평등한 세상이었지만, 반도인들의 후손들은 내지인들의 후손들처럼 부유하게 살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일부 성공한 반도인 후손들도 있지만, 많은 반도인들은 빈민가였던 반도촌의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느라 좋은 교육을 받기 어려웠고 따라서 좋은 직업을 갖기 어려웠기 때문에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었죠.
그러던 어느날 반도인의 후손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고, 이를 계기로 많은 반도인 후손들이 쌓여있던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평화로웠던 나라는 엉망이 되었고 반도인 후손들의 불만에 수긍하는 시민들도 용납하지 못하는 시민들도 나타났습니다.
일본의 다국적 IT 기업 ABC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나왔습니다. 의견 중 몇몇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에 대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 기업에서 핵심이 되는 개체를 나타내는 데에 일본어 단어 '내지', 핵심이 아닌 개체를 나타내는 데에 '반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고 이미 이는 50년 넘게 쓰이는 개념으로 자리잡아 있었던 것이죠. 기업 내 많은 직원들은 이 표현이 과거의 잔인한 역사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것에 동의했고, 기업 내에서 사용되는 표현을 교체하는 데 큰 비용이 들겠지만, 그래도 '주요'와 '부가'라는 표현으로 고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일부 개발자들은 이 결정에 공감했지만, 이를 PC충이라며 비난하고 비꼬는 개발자들도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일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내지', '반도'를 그런 차별적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데 강제로 좋은 표현을 못쓰게 만든다며 ABC 기업을 파시스트라 욕하고 있네요. 일부 사람들은 이제 '이탈리아 반도', '발칸 반도'라는 표현도 못쓰게 됐다며 그 단어들을 '이탈리아 부가', '발칸 부가'로 고쳐적은 세계 지도를 뿌리며 ABC 기업을 비꼬기도 합니다.
다행히도 평행세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요. 그래도 조선이 정말 독립하지 못해 비슷한 일을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합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는 것은 의미 없겠죠. 그 대신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생각해보는건 어떨까요? 사실 이 이야기는 미국에서 발생했던 인종 차별에 대한 비유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잘 와닿게 하기 위해 인종 대신 한국인들이 본능적으로 발끈할 수 있는 식민지배와 민족에 대한 것으로 바꿔치기 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쓰게 된 것은 최근 github을 소유하고 있는 Microsoft에서 중립적이지 않은 표현인 master/slave의 사용을 자제하고, 중립적인 표현으로 교체하겠다고 발표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https://www.bbc.com/news/technology-53050955) IT 업계에서는 관행적으로 메인인 개체에 master, 부가적인 개체에 slave라는 이름을 붙이곤 했습니다. 조금 오래되긴 했지만 IDE 하드디스크 같은 경우 OS 부팅에 사용하는 녀석을 master, 나머지 녀석을 slave라고 부르던 대표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최근 BLM 시위와 더불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나봅니다.
미국의 경우 노예제가 역사적으로 존재하였고, 그 노예제가 만들어낸 문제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노예제가 없었던 나라를 찾기가 더 힘들긴 합니다. 우리 나라만 해도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노비가 있었지요. 그러나 우리의 경우 주인과 노비가 인종적으로 차이가 없었기에 신체적 특징으로 구분이 불가했고, 또 거기에 조선 후기로 갈수록 노비의 숫자가 줄어듭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국 전쟁으로 인해 계급 체계가 완전히 무너져 질적인 단절이 발생했기 때문에, 노비제도에 의해 생산된 문제가 현대 한국에는 남아있지 않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인종 간의 경제적 불평등과 그로 인한 재생산되는 성장 환경의 차이는 스스로 해결되는게 불가능할 정도로 큰 문제입니다. BLM 문제 역시 당연히 노예제의 연장선 상에 있는 문제이구요. 그래서 Microsoft를 비롯한 여러 IT 기업들의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직원들 중 많은 수는 master / slave라는 표현을 접할 때마다 불편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whitelist / blacklist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master / slave라는 표현 대신 예를 들어 main / sub를 사용하거나, whitelist / blacklist라는 표현 대신에 allow list / block list 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을 권고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체적으로도 표현을 교체할 계획을 하고 있구요)
그런데 여러 커뮤니티들을 살펴보면 일부 국내 개발자들은 이를 쓸데 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주된 비판 중 하나는 아무도 master / slave를 그런 의도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master는 주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제어장치(11번 뜻풀이), slave는 노예라는 뜻이 아니라 종속제어장치(5번 뜻풀이)라는 뜻으로 쓴 것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사전과 언어의 관계를 거꾸로 이해하는 실수입니다. 사전에 저런 뜻풀이가 달린 것은 IT업계에서 master와 slave를 주제어장치와 종속제어장치를 가리키는데 사용했기 때문이지, 사전에 저런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주제어장치와 종속제어장치를 가리키는데 master와 slave라는 단어를 쓴 게 아닙니다.
따라서 왜 처음 주제어장치와 종속제어장치를 가리킬 때 master라는 단어와 slave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 그 의도를 고민해보는게 필요합니다. 해당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대략 컴퓨터가 발명되기 시작한 1950~60년대 즈음으로 추정해볼 수 있겠는데, 당시에 master-slave라는 단어쌍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를 생각해보면, 이가 주인-노예 관계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단어의 형태가 아니라 실제 가리키는 대상에 집중해야 한다는 철학적인 비판 주장도 있습니다. master - slave가 어떤 것에서 파생된 표현인지는 잘 알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며, 그 단어는 형태만 제공할뿐 실제로는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기 위해서 쓰인 것이라는 것이죠. 이 주장은 단어가 어떤 형태를 취하든 결국 가리키는 대상에 대해서만 사회적으로 합의가 잘 되어있다면 아무 문제 없다는 결론으로 귀결됩니다.
모든 인간들이 단어의 형태가 아닌 실제 가리키는 대상에 집중할 수 있게 완벽한 존재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보다 그 형태에 쉽게 매몰되기 때문에 같은 의미의 단어라도 표현이 바뀌면 이해하는게 크게 달라진다는 게 문제죠. 저는 언어, 심지어 사소한 단어 하나도 우리의 사고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단어 하나가, 그리고 그 단어들이 엮인 언어가 사람들의 사고구조를 되물림할 수 있기 때문에 차별의 여지가 있는 (혹은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은 사회적 비용을 들여서라도 고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도 단어가 실제 가리키는 대상이 중요하다고 정말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동해를 East Sea로 쓰나 Sea of Japan으로 쓰나 상관없다고 하실거라 믿습니다. 어차피 같은 바다를 가리키는데 표현만 다른 것일뿐이니깐요.
보통 같이 등장하는 비판 의견이 "그럼 master라는 단어를 아예 쓰면 안되는거 아니냐, 그렇게 따지면 쓸수 있는 말이 없다, 적당히 쓰자 그냥"입니다. 그러나 이는 전형적인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입니다. 누구도 master라는 단어를 아예 금지해버리자는 주장을 한 적이 없습니다. master라는 표현은 주종 관계에서의 주인을 뜻하는 것말고도 다양한 의미로 쓰입니다. 제일 기본적인 의미는 '위대한', '스승님'이며, 학술적으로 쓰일 때는 '석사 학위'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로 쓰이는 걸 고치자는게 아닙니다. 노예제를 연상시키는 '주인'이라는 의미의 표현을 배제하자는 것이지요.
스타워즈의 'Jedi Master'도 고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제다이를 master라고 부른다고해서 그 제다이가 우리를 slave라고 부르지는 않을테니깐요. 또 모 게임의 리그 등급인 마스터 등급이라는 표현도 금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브론즈, 실버, 골드, 플래티넘 리그 위에 있는 마스터 리그인것이지, 슬레이브 리그 위의 마스터 리그인게 아니니깐요. (만약 최신 게임이 리그제를 도입하면서 의도적으로 마스터 리그 / 슬레이브 리그 라고 이름을 붙였다면 미국에서 욕을 바가지로 먹고 문 닫았을 겁니다.)
문단 제목이 조금 강렬한데, 실제로 저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어서 최대한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저렇게 조금 더 중립적인 단어 사용을 제안하는것 자체가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윤리적(혹은 차별주의적)이라고 매도하기 위한 전체주의적 전략이라고 주장합니다. 대기업이 저렇게 평등을 지향하면서 master/slave라는 단어를 강제적으로 교체하여 사용하기 시작하면, master/slave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차별주의에 동의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고, 그 결과 여러 가지로 사회적 불이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단어를 교체하기로 결정한 과정 자체가 master/slav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민주적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음..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게 왜 나머지 사람들을 비윤리적으로 매도하려는 작전인지가 전혀 이해되질 않습니다.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몇 명이 갑자기 누군가를 돕기로 결심하면, 이게 돕지 않는 나머지 사람들을 악한 사람으로 만드는 행위일까요? 도운 사람들은 그게 자신들이 판단하기에 더 옳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것일뿐 그외의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돕지 않는 사람들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행위(돕지 않기)를 할 권리가 있지요. 각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것 뿐입니다. 단, 남을 돕기로 한 사람이 자신이 이게 더 옳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서 이거 할건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같이 할래?'라고 물어보는 상황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의견을 표출하고 제안하는 것 자체가 왜 반민주적이고 전체주의적인걸까요?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비난하는 상황이 반민주적이고 전체주의적인것 아닐까요?
물론 MS에서 자신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master/slave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 구직자에게 은근슬쩍 낮은 점수를 주어 면접에서 탈락시킬지도 모릅니다. 그런 경우라면 사회적 불이익을 받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게 과연 MS라는 기업의 지배구조를 공고히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면접을 탈락했다치면) 구직자가 면접을 탈락하면서까지 master/slave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지키려고했던 신념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걸까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를 향한 차별적 표현에는 누구나 언짢아 합니다. 그러나 남에 대한 차별적 표현에는 무디죠. 역사적 사건의 아픔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국가의 일부 시민들이 "이 표현은 안 좋은 것을 떠올리게 하니 다른 표현을 써줘"라고 말한다면, "아, 그래? 미안, 그런줄 몰랐어. 노력해볼게!" 라고 답해주는게 좋지 않을까요. 거기에 굳이 "너 지금 나를 차별주의자로 만들려고 했지? 근데 나는 그 말 그 뜻으로 쓴거 아니거든. 나한테 강제하지마!"라고 답변하는건 조금 이상해보입니다.
늘 옳은 말이 있습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기. 우리에게 비슷한 일이 있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저 역시도, 다른 이들이 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을 짧은 생각으로 무시하기 보다는 긴 생각으로 고찰하는 시민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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