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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경제와사회] 토지소유와 계층구조

수업노트/한국고대경제와사회

by 적분 ∫2tdt=t²+c 2013. 11. 20.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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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소유와 계층구조> 

하호의 위치에 대한 논란단순 노비였을까?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하호는 노비처럼 부림을 당한다' 문구 -> 하호라고 굳이 표기하고노예처럼 부려졌다는 것은 하호가 노예가 아닐 가능성을 보여준다. 

노비는 독립적인  구성하지 못하고주인의  종속된다下戶라고 표현한것은 이미  구성했다는 것이기에 자유민이라고   있다. 

하호는 상호의 대비되는 개념일텐데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못사는 농민을 가리킨것 아닐까반면 호민은 부와 권세가 있는 농민을 가리켰다. 

결론적으로 하호는 집단성이 강한 사회의 하층에 위치하는 자유민으로 보는것이 옳고사회마다 구체적인 경제력 등을 달랐을  있다. 

낙랑 대방군에 조알하러  삼한의 하호들이 인수(도장과 도장 주머니) 복장을 갖추었음하호는 읍락 사회의 중상층부 주민을 대상으로  것이라고 추측할  있음 

 

그렇다면 호민은 어떤 권한으로 하호를 노비처럼 부릴  있었을까아마 호민이 가진 대토지 때문일듯평등한 토지소유가 무너지고 공동체 수장의 토지 소유가 확대되면서 하호의 토지소유는 불완전했을것(배타적 소유권을 갖기보다는 점유권을 가졌을것이로 인해 인신적인 지배권까지 가지게 된것이라 추측할  있음. 

반면 조선 후기처럼 배타적 토지소유관계가 확립된 시점에서는 양반이라고 아무 농민이나 데려다가 일을 부릴 수는 없었다. 

 

관료들에게 수조권을 지급하는 방법은 삼국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이는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시스템수조권을 지급하는 방식은  3자가 토지를 소유하거나 지급된 수조권이랑 토지 소유 경계가 일치하지 않으면 수조권을 지급하는것도수조하는 것도 더욱 복잡했을텐데그리고 관수관급을 하는것인지 수조권자가 직접 수조하는지도 불분명함 이렇게 복잡한 방식이 정착했을까우리나라 국가의 형성은 중국처럼 강력한 통치권을 가지는 황제가 반짝 등장한 것이 아니라작은 집단들이 각자 치고받고 하다가 조금씩 확장되어 나가는 양상이기에흡수된 소국의 권리가 모두 사라지는  아니라 남아있었을 실제로 고구려 등에서는 국왕이 마음에 안들면 대가가 자신의 백성들을 데리고 떠나버리는 경우도 있었음마치 천자가 제후를 책봉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 국왕과 대가 사이에서 나타났을것 천자가 봉건제후에게 봉토를 나누어준것처럼 국왕이 귀족관료에게 수조권을 분급한것. (의제적 봉건제이를 영예롭게 생각했는지 귀족들은 수조권 분급을  선호했기에 사라지지 못하고 계속 남아있던것 (급여를 현금으로 주지말고 주식으로 달라고 하는 오늘날 주주들의 모습과도 유사)



한국 고대의 토지소유권 : 왕토사상 수조권 소유 완전무결하지는 않지만 개인적 토지소유 

수조권을 가진 재상이 법에 정해진만큼만 가져갔을까? 더 가져갈수도 있지 않나? 또한 개인적인 일에 그 농민을 부렸을수도 있지 않나? 

 수조권적 토지소유가 존재하는  완벽한 개인 소유의 토지는 있을  없다 

하호점유와 소유의 중간 단계에서 토지를 가지고 있지만자신이 노동  일부를 국가에게 역역으로 바치기도 . 


하호가 속한 소국이 다른 소국에게 정복당했다면  하호는 어떻게 될까 


상황1역과 세금을 바치는 국가가 바뀌게 피정복국의 백성들은 정복국가의 국민이라는 의식이 적음. 

정복한 소국이 중앙집권이 발달한 국가였다면정복당한 소국에는 군현이 설치되고피정복 왕족들은 중앙으로 끌려가 중간 귀족으로 편입됨피정복국의 백성들은 정복국의 공민(평민) 되는 경우도 있고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듯奴人(천민과는 다름)이라는 표현이 등장함피정복국의 백성  대다수는 공민으로 편입되었지만  일부 부락은 노인으로 편제되었음 경향이 고려시대의 부곡으로 이어지는것이 아닐까 추측(선생님 의견) 


상황2피정복국의 호민이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하호의 경우 자국의 호민과 정복국의 지배층에게 이중으로 역과 세금을 바쳐야하기에 더욱 고달팠을것피정복국의 호민 역시 예전처럼 세금을 걷지는 못할 것이고 위치를 오래 유지하지는 못할 시간이 흘러 정복국에서 지방관을 파견하거나 정복국의 착취가 늘어날 경우 피정복국의 호민은 소멸하게 될것. 


상황3피정복국이 저항을 악착같이 저항하여 왕족과 호민이 모두 죽어버린 경우(사다암의 경우). 공을 세운 사다암에게  기존 영토에 포함된 다른 귀족에게 배정된 땅을 뺏어서 준것은 아닐것새로 정복된 땅을 주었을 것이다. 

 

식읍과 녹읍봉건제도는 중국에서도 오랜 기간 남아있었음식읍은 당나라 5작위 체계(공후백자남) 확립된 이후로 제후에게 하사한 토지를 가리키는 군현제도가 확립된 이후에도 상징적 형식적 관념으로 남아서(법적으로 정해진 일정 사람 숫자당 지급된 토지단위로 걷을 세금을 대신 걷게 해줌후에는 토지가 부족해지자 '1000호에 해당하는 대우를 해주나 300호밖에 못ㅋ줌ㅋ'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시기에도 나타남 고려시대에도 식읍이 수여된 경우는 종종 있음명목상으로 받은 封戶 실제 지급받은 封戶數 차이 나는 경우 ‘食實封’으로 표현.) 

 

한국 고대의 식읍 

 

 송양왕이 항복해왔을  

 “夏六月 <松讓>以國來降以其地爲<多勿都<松讓>爲主 <>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 (『삼국사기』 고구려본기東明聖王 2)여름 6월에 송양왕이 국가를 가지고 항복해왔다주몽이 송양을 왕으로 책봉해주고송양국을 다물도로 이름을 바꾸었다 땅을 다시 복구시켜주는 것을 다물이라고 한다. 

 

 부여왕의 從弟 항복해왔을  

 “秋七月 <扶餘>王從弟 …乃與萬餘人來投 王封爲王 安置<掾那部>” (『삼국사기』 고구려본기大武神王 5)부여가 항복해오자 고구려왕이 이를 받아들여 연노부에 위치해줌. 

 

 법흥왕  금관국이 항복해왔을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以國帑寶物來降 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삼국사기』 신라본기法興王 19)금관국  김구해가 항복해오자 금관국을 식읍으로 주었다. 

 

 경순왕이 태조 왕건에게 항복해왔을 때도 마찬가지. 

 고대국가의 정복과정에서 피정복국의 首長 우대하는 정책의 하나로 채택정복국의 王者 冊封하는 형식. 한국 고대사에 보이는 擬制的 封建冊封 형식이 여기서 비롯食邑  유형에 속함. 

  정복이 대략 마무리된 뒤에는 공을 세운 왕족국왕에게 충성한 귀족戰功 세운 관료에게 식읍을 주기도 . 

  한국 고대국가의 출발 자체가 독자적인 세력을 지닌 大加들이 연합하여 중앙 권력을 구성했기 때문에擬制的 封建 형식을 援用했던 토지와 인민지배에서도 이러한 형식이 비중 있게 관철. 

 고구려 유리왕  선비족 격퇴에 공을 세운 扶芬奴에게 食邑  

 고구려 동천왕  관구검의 공격으로 위기를 맞았다가 겨우 탈출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密友 紐由劉屋句 경우 “<密友><巨谷><靑木谷<屋句><鴨綠豆訥河原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삼국사기』 열전5, 密友紐由) - 食邑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金庾信이나 金仁問  차례 식읍을 받은 적이 있음(김유신은 으로부터 2千戶문무왕으로부터 500김인문은 300) 

 고려시대에도 식읍이 수여된 경우는 종종 있음명목상으로 받은 封戶 실제 지급받은 封戶數 차이 나는 경우 ‘食實封’으로 표현. 

 한국사에서 마지막 식읍 사례는 조선 초기 首陽大君 “賜食邑千戶 食實封五百戶 若定于一州 則無以得閑民 請分定諸道 京畿 全羅 忠淸 慶尙道 各一百戶 江原 黃海道 各三十戶 咸吉道 四十戶 令觀察使擇富實戶 每一戶一名充定 …(朝鮮王朝實錄 端宗 원년 10 己亥) 

 

 

식읍의 특징 : 

 封爵 수반되는 고대국가의 官等  마찬가지로 인식. 

 受封者 單代 한정하여 혜택을 누리는 것이 원칙 

 식읍은 封戶 지급하는 (자연호가 아니라 課戶) 

 租庸調 3세를 모두 수취할 권한을 갖는다고 보기도 하고租調에만 한정된다고 보기도  

 수취방식은 食邑主 직접 수취 또는 官收官給으로 보는 견해로 나뉨(고려후기 최씨 정권의 晋陽府 경우는 官收官給으로 나타남). 

 

(하일식선생님의 와이섹 수업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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