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한국고대경제와사회] 식읍과 녹읍 & 정복과 조세 제도의 완성 과정

수업노트/한국고대경제와사회

by ∫2tdt=t²+c 2013. 11. 28. 17:07

본문


식읍: 대상자가 죽으면 환수하는게 원칙, 간혹 세습되는 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아버지가 죽고나서 환수했다가 아들도 그만한 공로가 있다고 인정되어 다시 준것으로 여겨짐. 식읍은 자연호가 아니라 법제호를 기준으로 나눠줬을것.

If 만약 자연호를 기준으로 지급했다면, 같은 300호를 받아도 어떤 이는 과부만

 가득한 호를 받을 있고, 어떤이는 장정이 많은 호를 받을 있음. 불합리한 부분이 많다. 그래서 법제호를 기준으로 지급했다고 여기는게 합리적임.

문무왕이 당나라로부터 받은 식읍은 당나라의 땅을 것일까? 거기로 세금을 걷으러 갔을리는 없고, 신라 땅을 주었을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여겨짐

 

식읍주가 특산물, 역역까지 거둘수 있었을까? 학계에서 논란 .

조선 마지막 식읍사례인 수양대군의 경우, 명목상 1000, 실질 500호를 받았으나 지역에도 받은 것이 아니라 전국 팔도 고루 나누어 합쳐서 500호를 받은것. 식읍지가 널리 분포되어있어 역을 동원하기에는 이동거리가 너무 길어서 불가능했을것. 하지만 고려 이전에는 어떠했을지는 불명확함.

 

식읍은 누가 거뒀을까? 고려 최충원 때의 식읍은 관수관급의 모습을 보이나, 신라시대는 알수 없음. 관수관급일 수도 식읍주가 직접 거두었을수도.

 

녹읍: 관료들의 연봉인셈.

관료전: 고려시대의 전시과 제도 양반전과 유사한 것으로 학계에서 추정되고 있으나, 그렇지 않을 있다.

687 관료전 지급

689 녹읍 폐지.

만약 관료전이 녹읍을 대체한거라면 687년에 녹읍이 같이 폐지되었어야하지 않나? 2 동안 관료전과 녹읍이 공존했으면 관료들이 봉급을 두배로 받은것은 아닐테고

하지만 녹읍 폐지는 실패하고 757 식읍이 부활한다. 귀족들이 녹읍을 선호했기에 계속 반발을 하여 부활하게 된것이라고 여겨짐. (귀족들이 봉건제후 행세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 돈만 받는 것보다는 땅을 받는게 농민들에게 경제외적인 강제를 있기 때문에.)


고대사회의 집권적 요소와 봉건적 요소

-봉건적 요소: 의제적인 부분에서는 봉건적인 요소가 많기도.

생각보다 오래 지속됨! 고려시대 -> 삼국시대에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었다고 하면 당시를 풍부하게 이해하지 못할수도

Ex: 고구려의 제가회의, 신라의 대등회의(통일이전), 화백회의(통일이후). 심지어 신라는 멸망할때까지 이런 귀족 회의제도가 존속하였다 : 왕이 후손없이 죽었을 경우에 후계자를 결정하기도.

 

공납과 조세: 정벌 주체세력의 범위가 넓어지는 과정에서 조세가 제도화된다. 정복주체가 피지배층을 대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 가능성에 대해서는 1115 참조)

고구려가 정복한 옥저나, 신라가 정복한 우산국의 경우 피지배지역에게 독립적인 지위를 주면서 정해진 의무만 다하게 하였다. 하지만 군사권 외교권을 박탈하여 독립을 시도하거나 의무를 어겼을 경우 군사적 응징을 가했을 것이라 추측할 있다.

정복지는 초기에 현지 토착 지배자의 말에 따라서 조세 수취를했겠지만시간이 흐르며 현지의 수취원이 중앙정부에 의해  철저하게 파악되고이가 제도화되어 신라 전체의 조세제도가 완성된것


 

지배자공동체 : 정복주체로서의 특권을 가졌고, 이가 배타적 폐쇄적으로 굳어진 경우가 신라 골품제라고 있다. 개방적인 성격을 보였던 로마와는 정반대

  

수취의 내용

  1. 정복주체: 지배층은 원래 군사활동을 했다.(평민은 참여해도 보급병에 지나지 않음) 신라는 6세기에 이르면 평민들도 전쟁에 출전함
  2. 피정복지: 일부가 노비로 잡혀가긴 하지만, 대규모 노동노예제는 발달하지 못하였다. 노동노예가 필요할 정도로 농업생산성이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 (노동노예는 주로 (식량이 부족하여) 교역이 활발한 지역에서 등장함 : 고대 그리스나 로마)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